일본사4 – 에도 막부 (17세기 이후)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에도 막부의 교류는 전쟁 중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한 회답겸쇄환사를 시작으로 조선 통신사로 이어지면서 다시 진행된다. 전쟁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책임으로 돌리고 도쿠가와 가문은 한 발짝 멀어지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외교 관계의 정상화를 이룬 것이다. 이번 글은 에도 막부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에도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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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도 막부의 성립

에도 막부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잇는 전국 시대 통일 정책을 계승하고 그 사이에서 대립하며 최종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에야쓰는 한평생 전쟁을 해온 무장들과 각 지방의 자율성을 통제해야 했다. 즉 중세의 봉건 시스템을 탈피하고 중앙 집권화하려 노력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정책은 ‘산킨고타이제’이다.

산킨고타이제는 다이묘들이 1년마다 자신의 영지와 에도에 교대로 거주하고 처자들은 인질로서 에도에 상주하는 시스템을 이야기한다.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에도로 갈 때 많은 수의 가신을 이끌고 가고 그 행렬의 형식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기에 화려하게 치장해야 했다. 이에 행렬에 상당한 경제적 비용이 들었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상권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는 다이묘들의 경제적 능력에 타격을 주려는 쇼군의 정책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각 번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막번 체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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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3 (도요토미 히데요시)

 

2. 에도 시대 대외무역

전국 시대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서양 세력과 교류를 해왔던 일본은 뱃길을 따라 동남아로 퍼져나가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무역은 지방 세력들이 부를 쌓기 좋았기에 막부는 이를 통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특히 서양 무역은 선교사들을 기점으로 이루어지는데 무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논란도 있었으므로 세속정치를 종교와 분리하고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통제 과정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크리스트교를 방임하며 살펴보았으나 17세기 초 전국에 금지령을 내려 박해를 하고 무역을 제한하였다. 특히 로마 가톨릭 계열의 포르투갈 선교사와 마찰이 있었으므로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도쿠가와 가문과 연계되어 있던 네덜란드 선교사를 통한 무역은 나가사키 항으로 허용하는 제한적 대외 무역을 실시한다. 1633년에 일본 선박이 막부의 허가 없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해외에 나가있던 일본인들도 허가없이 귀국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정책을 조선에서 시행된 쇄국정책과 비교해보자면 서양 세력에 대한 철저한 배척을 시행했던 조선에 비해 막부의 통제 아래에서 세계 흐름을 살펴보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어 제한적 무역을 시행하면서 네덜란드를 통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는데 이를 란가구(난학)이라고 한다. 제련술, 포술, 조선술, 지도 제작법, 서양 의학 등 서양 근대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문화도 유럽에 퍼져 도자기, 그림 등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3. 사무라이와 죠닌

전국 시대에 끊임없는 싸움은 사무라이의 경제적 바탕이 되었다. 전쟁에서 세운 공에 대한 대가를 받음으로써 부를 쌓기도 하고 권력을 가지기도 했다. 에도 막부가 시작된 후 경험하지 못한 평화기에 사무라이들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막부는 농민과 무사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형성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거주지를 분리하였다. 또한 농민들로 하여금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도록 함으로써 농민들이 무사화되는 것을 막았다. 사무라이들은 실업자가 되었으며 이들은 에도 막부 체제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평화 시기에 더 많은 부를 쌓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죠닌이다. 죠닌은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그로 인한 상품 수요가 증가함으로써 교환을 통한 부를 쌓아 올렸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토지를 개발하거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와 별개로 경제적 지위가 구분되어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더 커지기도 하였다.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한 불만은 에도 막부가 개항을 하게 되면서 극대화되었다. 미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교역이 시작되면서 물가 상승을 경험하게 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던 사무라이들은 더 힘든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전쟁을 해보지 않고 포기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만이 쌓여 막부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반감이 절정에 달하고 결국 막부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4. 에도 막부의 문화

전쟁 이후에 끊어졌던 조선과의 교류는 회담겸쇄환사가 다니게 되면서 다시 활성화되고 이후 조선 통신사로 이어지면서 꾸준히 진행된다. 이 길을 통해 성리학이 수용되며 뛰어난 유학자들이 등장하게 되고 막부의 정치 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친다.

헤이안 시대에 견수사, 견당사가 폐지되고 일본 특유의 문화가 등장했던 것처럼 서양과의 무역을 통제한 에도 막부에서도 특유의 문화가 등장한다. 특히 죠닌이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우키요에와 가부키 등 특유의 문화를 발생시켰다. 가부키는 에도 시대 때부터 유행하였던 연극으로 남자가 여자의 역을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청나라의 경극과 유사하지만 무대 구성에 있어서 가부키는 관객석 중앙으로 나올 수 있는 돌출형 무대에서 이루어진다. 가부키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홍보용 판화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키요에이다. 처음에는 홍보용 판화로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흘러 섬세함과 정교함, 일본 특유의 문화가 드러나게 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만들어낸 도자기들이 더욱 발달하여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도자기도 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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